삼국지DS

어릴 때 꽤 많은 게임을 했지만  - 최근 몇 년간 거의 게임을 못했지만 - 끝까지 해본 게임은 거의 없다. 게임을 즐기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초등학생 때 시작한 삼국지 2는 최소한 오 년은 계속 플레이 했지만 한 번도 통일을 하지 못했다. 남들은 새로운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몇 번씩 통일을 한다더만. 그 이후 시리즈가 11편까지 나오는 동안 대여섯 편쯤 플레이 했는데 역시 통일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지금까지 해본 게임 중 좋아하는 게임을 꼽자면 첫 다섯편 안에 꼭 드는 것이 대항해시대 1이다. 이것도 수년간 계속 하고 쉬었다가 다시 하고, 급기야 스물이 넘을 때까지 했는데 한 번도 엔딩을 보지 못했다. 대항해시대 2편은 대항해시대 시리즈 중에서도 특히 명작으로 불리는데, 이건 두 번 정도 엔딩을 봤다. 그렇다고 2편이 1편보다 더 재밌었다는 건 아니다.

대항해시대 1: 지금도 스샷을 보기만 해도 두근거린다

대항해시대 2

캐피탈리즘 2도 오래 한 게임 중 하나다. 이건 스물이 넘어서 했는데 삼 년 정도 한 것 같다. 정말 재밌게 했고 이 역시 가장 좋아하는 게임 중 하나지만 엔딩은 커녕 부자가 되본 적도 없다.

지금까지 엔딩을 본 게임은 손에 꼽을 정도다. 대항해시대 2, 문명 2, 음.. 더 기억이 안 난다.

왜 이런 몸이 됐을까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마이크로 매니징에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삼국지를 예로 들자면 이렇다. 삼국지 게임을 하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건 통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통일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다. 좋은 인재를 모으고, 땅을 개발하고, 병사를 모아서 승산 있는 전쟁을 하고, 그 과정에서 또 인재를 얻고 땅을 얻고... 그렇게 해서 결국 통일을 하겠다는 거다. 그런데 내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게임은 과정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은 '과정을 즐기면서 -> 엔딩을 보겠다'라는 목적하에 플레이 하는 게 보통인데, 내 경우는 '과정을 계속 즐길 수만 있다면 엔딩같은 건 보지 않아도 좋다'가 된다.

통일을 위해 땅을 자꾸자꾸 늘려가면 그만큼 관리해야 하는 땅도 늘어난다. 엔딩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안전한 곳은 대충 두고 전선에 집중해서 계속 이기고, 이기고, 이기면 되는 문제다. 그래서 삼국지에는 위임이라는 기능이 있다.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땅은 위임을 통해 인공지능에게 관리를 맡긴다. 그런데 나는 이놈의 위임이란 기능을 좀처럼 써본 적이 없다. 관리하는 게 재밌어서 게임을 하는 건데 왜 위임을 할까? 나는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기 때문에 병사가 있는 모든 장수는 훈련이 100이 되어야 하고, 모든 장수의 충성심도 100이 되어야 한다. 모든 장수의 능력은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 모든 땅은 최고로 개발되어야 하고, 모든 인재는 탐색되어야 하고, 내가 좋아하는 장수는 내 수중에 꼭 넣어야 한다. 전쟁도 좋아하지만, 사실 내가 아끼는 장수가 다치는 게 싫기 때문에 전쟁은 최소로 한다. 대신 시간이 더 걸리지만 안전한 방법을 사용한다. 계략을 통해서 장수의 충성심을 떨어뜨리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찾아가 인재를 결국 데려온다. 상대의 남아있는 병사가 없어서 완전히 안전할 때만 전쟁을 한다. 아니면 태수를 끌어들인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기 전에는 전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한 턴을 끝내는 시간이 길고, 확장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보면 군주가 죽는다. (내가 주로 플레이하는 손견은 수명이 짧다.) 새 군주가 뒤를 이으면 많은 장수들의 충성심이 떨어진다. 그러면 그걸 다시 올린다. 이러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땅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한 턴에 걸리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장수들이 천수를 다 누리고 자연사하기 시작하면 결국 엔딩을 못 보는 거다.

암튼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 것도 오늘로 끝이다. 왜냐하면 전국을 통일했기 때문이다. 삼국지 DS는 직할할 수 있는 장수가 정해져 있어서(장군이나 군사만 직할 태수가 될 수 있다.) 할 수 없이 많은 땅을 위임해야 했다. 물론 할 수 있는 최대의 땅을 직할하고 모든 요소를 관리하려는 버릇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전선도 아닌 곳에 뛰어난 장군과 군사를 남겨둘 수는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위임을 사용했고, (안전하게 싸우려면 압도적인 능력차가 필요하다.) 인접한 땅에서만 장수를 데려갈 수 있는 제한 때문에 충성심 관리도 완벽하게 하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에 하기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무한히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고, 턴제 게임이라 삼십분씩 끊어서 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 덕분에 결국 내게도 이런 날이 온 것이다.

이걸로 내 병(?)이 나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by 어이 | 2008/01/25 23:28 | 헤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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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지름쟁이뽕 at 2008/02/02 18:48

요새 심하게 디에스가 땡기는중 ㅋㅋㅋ
Commented by 어이 at 2008/02/02 23:55
@지름쟁이뽕: 과장님도 질렀는데 가만히 있을쏘냐 질러요 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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