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에서 배우는 인생

안녕!

알다시피 삼년 전 이맘 때 나는 중환자실(집중치료실; ICU)에 있었다. 긴 잠을 잔 기분에 조금씩 정신을 차리는데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소리였다. 삑 삑 하는 전자음, 쐐액 쐐액 하는(사실 뭐 이렇게 무서운 소리는 아니었다) 기계의 도움을 받은 숨소리, 눈을 떠보니 내 몸은 작은 방 안에 놓여 있었다.

거기는 ICU의 일부를 몇 장의 긴 판때기를 세워 만든 부실한 곳이었는데, 그래도 나름 문도 달렸고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그런 방이었다. 그 큰 ICU에서 방을 가진 사람은 나를 포함해 셋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 방을 차지하는 데는 나름의 규칙이 있... 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신이 있는 사람이거나, 곧 죽어 나갈 사람이 차지하는 방. 사실 ICU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겉보기엔 천차만별이지만 다음 날 누가 죽어 나갈진 모르는 거라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그 밤 나는 고비를 한 번 넘겼고, 매일 매일 시끄럽게 소리 지르던 옆 방 할아버지는, 나갔다. 그러니까, 누가 알겠느냐 말이지.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개수가 제한돼 있어 아무나 가질 수는 없는 방, 나는 거기서 매일 밤 혼자 싸웠다. 처음엔 아편계 진통제의 힘을 빌어 잘 잤다. 몇 시간씩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꿈을 꾸면서 잘 잤다고 말하긴 뭣하지만 그 뒤로 두 주간 이어진 끔찍한 밤들에 비하면야! 나는 폐 절제를 했기 때문에 숨 쉬는 게 지금처럼 당연하지 않았다. 혈중 산소 농도가 떨어지면 경고음이 울린다. 숨을 열심히 신경 써서 쉬면 농도가 올라가고, 잠시 딴 생각이라도 하면 농도가 내려간다. 그런데 혈중 산소 농도를 표시하는 LED가 내 머리맡에 있어서 나는 볼 수가 없었다. 숫자가 오르는지 내리는지 알 수 없이 위험한 수치로 떨어진 다음에 경고음이 울리고 나서야 알 수 있다는 얘기는, 결국 공포에 쫓기면서,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숨을 쉬어야 한다는 얘기다. 어디 잠깐이라도 안심을 하겠느냐고.

밤이면 ICU에도 불이 모두 꺼지고, 정적이 온다. 나를 지켜봐 주는 간호사도 이제는 별로 없다. 지나가다 닫힌 창 너머로 슬쩍 들여다 볼 뿐이다. 내가 잠들면 경고음을 들을 수 있을까? 아님, 죽을까...? 난 한숨도 못 잤다.

그래서 난 낮에만 잤다. 안심하고 잔 것은 아니고 지쳐서 잤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ICU에 들어왔다.

그녀는 - 내가 그 뒤에 들은 정보를 이리 저리 조합하자면 - 마흔 초반 정도의 여성으로 고래고래 지르던 목청으로 봐서 몸집이 좀 있을 것 같았다. (난 누워 있으니 밖이 안 보인다.) 신경안정제 과다 복용으로 병원에 실려왔고 위세척 후에도 뇌에 후유증이 남은 것 같았다. 자세한 의학적 판단이야 난 잘 모르지만, 그녀의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는 건 나도 안다. 그녀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난 그게 전화 통화라고 생각했다. 저 여자는, 지금 자기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상대방의 대답은 자기 머릿속에서 듣고, 그 사람과 계속 대화를 하는 거지. 그러나 며칠 듣다 보니 전화 통화는 아니었다. 등장 인물이 셋을 넘었다. 나는 낮에만 잘 수 있는데, 그녀의 대화 소리에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픈 사람이 목청은 어쩜 그리 큰지. 하지만 곧 나는 그 이야기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고, 라디오는 지직거렸고, 며칠에 한 번 식구들이 들고 오는 만화책은, 참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 읽고 난 뒤의 허탈감을 어떻게 견딜까?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낫다.

그녀의 이야기는 날이 갈수록 본론을 향해 달려갔다. 처음엔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차례로 등장인물이 등장했고, 그들의 캐릭터가 나타났고, 그녀가 처한 상황이 드러났다. 그녀는 어떤 남자를 만났다. 그가 낮에 제정신일 땐 그녀에게 따뜻하게 잘해줬는지, 밤엔 어땠는지, 처음엔 다정하다가 나중엔 그렇지 않게 되었는지, 사정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에게는 그가 문제다. 어쩌면 폭력. 그녀는 친구와 통화를 하고, 오빠와 상담을 하고(친오빠이거나 조폭이거나), 혹은 그 본인에게 사정을 했다. 왜 이래, 제발 이러지 마, 그건 안돼, 그러지 마.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찾아온다. 오빠, 사람들이 그를 잡으러 왔어! 그는 심각한 골칫거리이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그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잠들었다. 그리고, 끔찍한 비명과 울음소리. 그가 마약을 한다고. 마침내, 인지.

갑작스럽지만 결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건 아니다.

by 어이 | 2008/07/09 00:45 | 헤이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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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uapz at 2008/07/09 04:27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건 아니지만 모르는 것은 그 모르는 것을 없는것으로 만드는거 같아요.

잘지내시죠?
Commented by 어이 at 2008/07/09 08:18
맞는 말씀입니다.

안녕하세요! 전에도 댓글에서 뵌 거 같은데 왜 이리 반갑죠? :) 저는 지난 몇 년간 이래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잘 지냅니다. 매일 기록을 세우고 있지요. 별 일 없으시죠? 많은 인사들이 제 뜻과는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지만, 요건 진짜로 하는 말입니다.
Commented by luapz at 2008/07/09 09:13
별일이 많았습니다. 평생에 다시 없을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듯 합니다.

국가직 7급 임용시험에 합격하고 발령이 나기를 반년째 기다리는 중입니다. IT계열에서 먹고 살게 되겠거니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곳에서 먹고 살게 되는군요.

이번주에 산림청에서 발령이 날지 안날지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기다리는 전화는 오지 않고 있네요.
Commented by 어이 at 2008/07/09 10:00
아이구 반 년이나, 잘 쉬셨겠네요! (...) 빨리 연락이 오면 좋겠군요. 공무원 하면서 취미로 프로그래밍하는 게 모든 긱들의 꿈이잖아요. 건승하시길!
Commented by ddt at 2008/07/09 14:11
ㅋㅋ 정말 갑작스런 결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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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괜찮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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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미용실에 가면 긴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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