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소설
2008/10/15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나는 어느 날인가 잠에서 깨어 보니, 나 자신이 이미 추리 중독이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뭐 그런 란포적인 현실 위에 놓여져 있었다. 처음은 남들과 마찬가지로 애거서 크리스티, 셜록 홈즈, 괴도 뤼팽 등으로 시작했지만, 거기서 더 발전하지는 못하고 다른 경로로 추리 중독을 해소하고 있었고 --- 게다가 그걸 인지하지도 못했다는 --- 그런 상황이랄까. 근처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추리물을 읽고 보고 듣고 난 후에 금단 현상이 일어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만화, 영화, 드라마를 게걸스럽게 읽어내고 이제 도박물, 형사물, 범죄물, 사기물, 어딘가 추리 냄새가 좀 묻었다 하는 온갖 장르물을 해치우고 나니, 이제 드디어 본격 소설 읽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그러나 나는 시작을 못 하고 있었다. 내가 김용 이후로 무협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랄 수 있는데, 도무지 그보다 나은 작품이 있을 수 있겠냐는, 물론 좋은 책들이 많겠지만, 실패 없는 소심한 삶을 살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시행착오라는 말뜻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 여기가 딜레마가 발생하는 지점인데, 하나 --- 첫 시작이 성공일 경우 다음 실패가 더욱 두려워질 것이고, 둘 --- 실패일 경우 다시는 더 도전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두려움.

아무튼 그러고 있는 사이, 우연찮게도 렛츠리뷰 위젯을 달게 됐고, 기이하게 그 회차에 추리 소설이 몇 개씩이나 리스트에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 또한 란포적인 우연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재밌는 게 지난 주까지만 해도 오스터적인 우연이라 썼을테다.

아마 그 회차는 전부 떨어지고 다음 회차에 이글루스 렛츠리뷰에 처음으로 당첨이 되어서 책이 왔다. 지난 회차엔 훨씬 재밌어 보이는 책이 많았는데, 이번엔 단편집인데다 시리즈 중 마지막 한 권인지라, 사실은 당첨 소식을 듣고서도 좀 실망했었다. 그런데 받아보니 600페이지 남짓하고 손에 들리는 느낌이, 오, 실하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다 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책이 한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너무 좋다. 책 내용도 중요하지만 나는 표지도 중요하고, 들고 오고 가며 읽을 때 들리는 느낌도 중요하고, 쪽 넘김, 책 냄새도 중요하다. 어느 하나 딱 '이게 좋다' 할 기준은 없지만 그렇게 여러 가지가 딱 맞는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두껍고 가벼운 조합이 이렇게나 좋구나.

뒤늦게 받아들고 보니 1, 2권은 본격추리고 3권은 기괴환상이라 한다. 나는 본격추리인 쪽이 좋았을 걸. 아마 나처럼 추리 소설을 읽겠다 싶은 사람이라면 1, 2권을 사든지 아니면 전 권을 사는 게 좋겠다. 세 권이 모두 책꽂이에 꽂혀 있으면 아마 기분이 무척 좋아질 것 같다.

책이 두꺼운 데도 불구하고 요즘 나오는 책 치고는 양장이 아니며, 책줄이 없고, 짤막한 단편 위주로 되어 있으므로,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옛 버릇이 돌아왔다. 기억하기 좋은 쪽수에서 아무리 재밌는 장면이라도 책을 그냥 덮거나, 무리하여 좀 더 읽는 거다. 예를 들면 5나 10으로 떨어지는 페이지까지 읽기. 또는 2의 n승수나 123, 234처럼 이어지는 수, 아니면 모두 같은 숫자로 이루어진 페이지까지 읽고 덮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읽다 보면 책갈피가 없어도 책을 읽을 수 있다. 나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주변에 자랑 삼아 말해 보았더니, 보통은 '괴기'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 단편집의 테마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괴기는 아니다. 기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쓰이지 않는 단어는 아니되 대중에서 흔히 쓰이는 것도 아니어서, 다소 일본적인 냄새가 난다. 일본 소설이니까, 그래서 뭐 어떻다는 것은 아니지만, 예비 독자들의 이해를 돕자면, 기이하거나 괴상하거나 환상적인, 꿈같거나 악몽같고, 끔찍하며 때로는 요상망칙한.

탐정취미가 --- 즉, 추리소설가로써 몇 편이고 썼을만한 소품 성격의 글이 대부분인데, 그중에서도 소재나 주제, 트릭, 아이디어, 흐름, 문체 뭔가 특별한 것이 하나씩 있는 단편들이 실린 모양이다. 그리고 몇편의 완성도 높은 작품도 있다. 사실 여기에 무서운 이야기는 결코 없다. 그러나 가장 인상깊었던 고구마벌레라는 작품을 떠올리면,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정말 끔찍하다. 그러니까, 꼭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에도가와 란포의 기이한 이야기들, 정도가 알맞지 않을까 싶다.

by 어이 | 2008/10/15 01:39 | 어이,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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